[1042] 우리 가문의 제1대 믿음의 조상, (고) 박갑순 권사님의 일대기 추모의 글.
1. 어머니 박갑순 권사님의 소개
① [박갑순 권사님]은 전북 남원에서 3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나, [소재철] 선생님과 결혼하여 33명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자손들은 ♣자녀[4명] 1남, 3녀. ♣자부[1명]. ♣사위[2명]. ♣손주[9명] 손자2명 외손자2명. 외손녀5명.♣손부[6명]. ♣증손[11명]이 있습니다.
② 1970년도에 [서울 동일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시무권사로 임직을 받아 충성하시다가, [경기도 평안교회]에서 원로권사님으로 헌신봉사를 해 오셨습니다. 부군이신 [소재철 장로님]은 2016년5월7일 만90세 일기로, [박갑순 권사님]은 2023년8월9일에 만93세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에 입국하셨습니다.
2. 어머니 박갑순 권사님의 소녀 시절.
[박갑순 권사님]은 전북 남원시에 박씨 가문에서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성실하고 인자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오빠와 남동생]과 더불어 소녀시절을 화목하게 보냈습니다. 그 당시는 유교 문화 권이어서 여자로 태어난 [권사님]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나 어릴 때부터 지혜롭다고 칭찬을 받고 어여쁜 소녀로 성장하였습니다.
3. 어머니 박갑순 권사님의 결혼생활.
[박갑순 권사님]은 17세에, 21세인 [소재철]선생님과 결혼하였습니다. 시댁은 한학자 집안이었고 [시아버님]은 인품이 온화하시고, [시어머님] 성격은 불같고 까다로웠습니다. 남편은 심성이 착하고 효자이나 표현이 없고 무뚝뚝하였습니다. 당시 [시부모]는 성격차이로 별거 중이었는데, [권사님]은 시집을 오자마자 홀로 자녀4남매를 키우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신혼 초부터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4. 남편이 6.25 전쟁 중 육군에 입대함.
① 당시는 6.25 동란 중이었습니다. [남편]은 결혼한지 5년 만에 25세 되던 해 육군에 징집되어 입대하였습니다. 이때 권사님 복중에는 첫아이(큰딸)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군대에 가고 없자 시어머니는 더 고된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이때에 [첫째딸]을 출산하였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방에 굼불조차 때지 못하게 하여 냉골 방에서 아이에게 덮어줄 이불도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방안에 떠다 놓은 맹물이 얼어 얼름이 되는 환경 속에서 험하고 고된 생활을 감래했습니다. 어린 딸에게 젓을 먹이려는 일념으로 허기진 배를 맹물로 채우고 콩잎을 씹어 먹으며 어린 딸에게 억지로 젖을 짜 먹이면서 서러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② 고향에는 군에 징집되어 나갔던 청년들이 많이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아무 기별이 없었습니다. 시어머니는「니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소식이 없으니 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하라...] 하면서 내어 쫓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딸을 가슴에 품고 악착같이 견뎠습니다. 그때 겪은 시집살이는 차마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5. 남편의 육군 부사관 진급 소식과 전역 .
① 그러던 중에 희소식이 왔습니다. [남편]은 이등병으로 군에 입대하였는데, 육군 부사관으로 진급이 되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남편]은 다행히 포병으로 보직을 받아 전차를 타고 이동하였기에 6.25 전쟁 통에 구사일생으로 살 수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부사관 진급이 되니 육군에서 군인 가족에게 부양 미(쌀과 보리쌀)를 보내주어 이제 좀 살만하였습니다. [남편]은 6.25 전투와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에 참여하고, 논산훈련소에서 교관으로 복무하였습니다.
② 그런던 중 [남편]이 복무 중에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였습니다. 국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회복이 길어졌습니다. 전쟁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약해진 남편은 자원하여 전역을 신청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후에 [남편]은 6.25 전투에 참전한 국가유공자요, 호국영웅기장을 수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전역 후 [남편]은 마음을 잡지 못했습니다. 매일 술을 먹고 술이 깰 때까지 군에 대한 향수에 젖어 사회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6. 어머니는 불교신자인데 자녀들에게 교회 나가는 것을 하락함.
① 우리 집 근처에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큰딸과 큰아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후에 약 1.2km 떨어진 곳에 예배당을 지어 교회가 이사를 하였으나 우리 자녀 3남매(큰딸, 큰아들, 둘째아들)는 이 고향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큰아들]은 눈이 오는 날에는 교회에 가면서 [동네 할머니]들을 위해 당그랭이로 눈길을 밀어 길을 내주고 기쁘게 교회에 다녔습니다. [두아들]은 여름성경학교와 성탄절이 되면 교회에서 상품을 많이 받아오기도 하였습니다.
② 당시 우리 집은 가난하였습니다. 두 아들에게 제때 이발소에 보내지 못하여 장발로 지낼 때가 있었는데, 교회에 나가면 교회에 [윤명환 집사님](지금은 장로님)이 무료로 머리를 빡빡 깎아주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시골교회는 담임 교역자가 [손오복 전도사님]이었습니다. 우리[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전도사님]을 보고 자라왔기에 장래의 꿈이 [전도사님]이 되는 것이었고, 학교생활기록부에도 장래희망을 [전도사]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③ 이때 우리 [어머니]는 불교 신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리산] 밑 [천왕봉] 중턱에 [위정사] 라는 절에 다녔습니다. 열성 신자는 아니지만, 당시는 불교와 유교 풍토이어서 동네 사람과 어울려 절에 나갔습니다. 한 번은 무당을 불러서 지긋지긋한 가난과 우환을 내쫓는 굿을 하는 기억도 있습니다.
7. 큰딸을 서울로 보내고, 남편도 무작정 서울로 떠나감.
① 당시 우리 나라는 가난하여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시절입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딸(큰딸)은 지인의 소개로 우리 지역 양해준 국회의원의 누나 집에 가사도우미로 보냈습니다. [큰딸]을 밥이라도 굶기지 않고, 중학교에 보내줄 수도 있다는 지인의 말을 믿고 서울로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먼 타향에 보내고 30리가 떨어진, 멀리 남원 기차역에서 기적소리가 울릴 때면 [어린 딸]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며 ‘한에 맺힌 노래를 부르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② 이 무렵에 [둘째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마음을 잡는가 싶더니 돈을 벌어 오겠다며 무작정 서울로 떠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를 [어머니]가 지키며 홀로 농사를 짓고 아들 둘과 딸을 부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꽁보리밥] [무우밥] [수제비] [칼국수] [아욱국] [고구마] [감자]라도 챙겨 먹이며 자녀들을 굶기지 않았습니다.
이때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남편]이 만들어 주고 간 [작은 지게]를 지고, 땔 나무를 해 오기도 하고, 꼴망태를 메고 풀을 베어와 집안 일을 도왔습니다.
③ 우리 [두 아들]은 언제나 밝고 씩씩하게 자랐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산과 들로 다니며 개구리 뒷다리와 메뚜기를 구워 먹고, 산속에서 새알을 꺼내 먹으면서도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우리 두아들은 주일이 되면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동네 꼬마대장으로 동네 아이들도 데리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8. 어머니가 큰아들을 데리고 절에 나감.
① 사월 초파일이 되면 [어머니]는 절에 바칠 시주를 챙겨 머리에 이고, [큰아들]의 손을 붙잡고 절에 갔습니다. 배고픈 시절에 절에 가면 [하얀 쌀밥 (메밥)]을 주니까 그걸 아들에게 얻어 멱이려고 데리고 간 것입니다.
②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큰아들]은 절간 앞에 도착하면 사찰 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사찰 출입문 앞에 '큰 칼을 치켜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절간을 지키는 수문장' 그림을 보고 '너무 무섭고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절에 갔다 온 뒤에는 악몽에 시달리고 마귀와 싸우는 꿈을 꾸었습니다.
③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가족들 행복을 기원하여 큰 부처상 앞에 일백 배를 드렸습니다. 뒤에서 지켜본 우리 [큰아들]은 이것은 성경에서 금하는 우상숭배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는 [아들]에게는 절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9. 큰아들을 중학교에 보냄.
① [큰아들]은 어릴 때 병치레를 많이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픈 아들을 등에 업고 약 2km 떨어진 면 소재지 의원까지 땀을 쏟으며 다녔습니다. [아들]을 업고 고개를 넘어 갈 때마다 땀이 범벅 되고 힘이 들어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도 아들을 위한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병치레하는 [큰아들]을 고치려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아들에게 무속인을 산 어머니로 맺어준 일이 있습니다.
② 그런 귀한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 등록금이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어머니]는 이집 저집을 다니며 등록금을 빌려 입학을 시켰습니다. [아들]은 약 5km나 떨어진 중학교를 걸어서 다녔는데, [어머니]는 매일 새벽밥을 지어 먹이고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10. 어머니가 처음으로 자진하여 교회에 나감.
① [큰딸]이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는 [큰딸]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딸]이 서울에 간 후에는 [큰딸]의 친구들이 아무도 놀려오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올라간 딸은 [어머니, 교회에 꼭 나가세요] 편지를 보내왔고 [어머니]는 [큰딸]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② [큰딸]이 그리워진 [어머니]는 동네[아주머니]와 함께 [딸]이 나갔던 교회에 나갈 마음을 굳혔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교회에 나갈 때 일입니다. 마치 사월 초파일 날, 절에 갈 때처럼 [어머니]는 떡을 만들어 머리에 이고 동네 아주머니와 함께 [고절교회]를 자진하여 나갔습니다. 교인들이 [어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어머니]가 교회에 적응할 즈음에 우리 가정은 서울로 이사할 환경이 생겼습니다.
11. 우리 가정은 서울로 이사하게 됨.
[큰딸]이 서울에서 O.P.C 전자주식회사에 취직하고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딸]에게 따뜻한 밥이라도 해주기 위하여 고향 집과 논답을 팔고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었습니다.
1973년에 [막내딸]을 늦둥이로 낳았습니다. 우리는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한이불을 덥고 함께 살았지만 불평하지 않고 항상 감사하고 행복하였습니다.
12. 우리 가족의 신앙생활과 어머니의 신앙관.
①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장로교회를 선택하여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교회부흥회에서 은혜체험을 했습니다. 방언은사를 받고 기도에 열심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일상은 거의 매일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새벽기도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항상 전도와 심방에 열심이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놀라서 걱정하는 운전기사에게 나는 괜찮으니 어서 가시라고 보내고, 그 이후에 후유증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서울 광진구 동일장로교회에서 헌신봉사하는 중에 시무권사로 취임하였습니다.
②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나님 은혜로 서울에서 방 세칸짜리 연립주택을 샀습니다. 고향에 [큰집 손자]가 서울 국민대학교에 합격을 하였는데 마땅히 있을 곳이 없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4년을 돌보며 기독교 신앙을 갖게 인도하였습니다. 그 손자가 서울 건국대학교 단과 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작은집 조카딸] 2명이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싶은데 서울에 있을 곳이 없을 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수년을 돌보며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게 인도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처럼 친척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심고 고향 일가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매일 신구약성경을 필사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사셨습니다.
③ [어머니]는 10가지 확고한 복음신앙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첫 째]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 째] 예수님을 믿고 높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 째] 모든 예배에 늦지 않게 출석하는 것입니다.
[넷 째] 성경을 읽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교회를 아끼고 맡은 직분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주일은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일곱째] 십일조는 (하나님 것)으로 온전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여덟째] 주의 종 목사님을 선대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홉째] 사람을 사랑하고 형제끼리 화목하는 것입니다.
[열번째] 본향인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어머니] 박갑순 권사님의 평생 소원이셨습니다.
어머니는 목사가 된 [큰아들]에게도 주일날 미리 강단에 업디어 기도하라라고 당부하셨고,
[딸]들에게도 주일날 예배에 늦지 않게 참석하라고 단단하게 당부하셨습니다.
13. 세 딸과 며느리에게 순금 반지와 아들과 사위에게 양복을
① 어머니의 자녀들 4남매(큰딸, 아들, 둘째 딸, 막내 딸)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생활비를 매월 똑같이 N분지 1씩 분담하여 봉양하였습니다. 어려운 중에서도 마지인 큰딸과 매형이 아버지(장인) 어머니(장모)에게 제일로 공궤를 잘하였습니다.
② 어머니는 노인기초연금과 큰딸(큰사위)이 매달 보내 준 효도용돈과 가족 모임 때 자손들이 드린 용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을 먼저 떼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손주와 증손들이 오면 주머니를 열어 용돈을 주는 재미로 사셨습니다.
③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년 전부터 돌아가시는 해까지 세딸(큰딸, 둘째 딸, 셋째 딸)과 자부(며느리)에게 까지 순서대로 순금팔치 닷돈씩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아들]과 [사위]에게도 양복을 맞춰주며 고마운 추억을 남겨주셨습니다.
14. 어머니의 건강생활과 췌장암 진단.
① [어머니]는 평소에 기관지천식, 척추통증, 소화기능이 약하여 동네 병. 의원에 내원은 하였지만, 하나님 은혜로 큰 질병 없이 지내셨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에 척추협착증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기 위해 성남시 분당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척추센터 담당교수는 MRI 결과 척추 상태가 너무 안좋고, [어머니]가 고령이라 수술해도 회복이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대신 주사와 약물치료를 하자고 하여 그때부터 8년동안 통증완화 주사시술과 약물복용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진료비와 약값은 [어머니]의 자녀들 4남매(큰딸, 아들, 둘째 딸, 막내 딸)가 똑같이 나누어 감당하였습니다.
② 어머니가 94세 되던 2023년3월 달에 갑자기 [어머니]가 쓰려져 참조은병원 응급실에서 응급처치와 초음파, 시티검사를 하였는데, 별이상이 없어 영양제를 맞고 회복이 되어 퇴원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5월달에 [어머니]가 식욕이 떨어지고 통증이 심하여 119를 불러 참조은병원 응급실에서 초음파와 시티검사를 하였습니다. 갑자기 소화기내과 과장이 응급실로 내려오고 분위기가 좀 이상했습니다.
응급실 과장은 보호자(아들)를 불러 [어머니]가 췌장암이 간에까지 전이가 된 시티 사진을 보여주며 췌장암이라고 알려주고, 소화기내과에 올라가서 과장(전문의)과 면담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소화기 내과 전문의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하고, 즉석에서 건강보험공단에 암 등록을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 생존기간이 길면 6개월, 짧으면 3개월 정도라면서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병원에 입원을 조언하였습니다.
보호자인 (아들)는 큰 충격을 받고 [그래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병원에서는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면서 재차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병원에 입원을 조언해 주었습니다. 응급실에서 통증완화주사와 영양제링거를 맞고 통증이 다소 완화가 된 [어머니]는 [이제 다 낳았다. 어서 집에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병원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③ 그러나 아직은 [어머니]를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은 자녀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형제들과 상의하여 [어머니]를 집에서 최대한 돌보기로 하였습니다. 집에서 57일간을 간호하였습니다. 이때 [자녀들, 자부, 사위들, 손자들, 증손들]이 돌아가며 [어머니](할머니)를 찿아와 문병하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어머니]는 식사를 못하시고 죽조차 잘 못드셨습니다. 배변을 못하여 관장을 하는데 무척 고통스러워 하였습니다. 마약진통제를 처방받아 복용해도 통증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심해졌습니다. 수면 중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밖에 누가 왔다고 말하고 먼저 소천한 친구 권사님을 보기도 하고 특히 통증로 잠을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이제 집에서는 [어머니]를 도와드릴 방법이 없고 평안케 해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형제들과 상의하여 **호스피스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호스피스병원에 입원하여 몰핀수액과 영양수액을 맞으면서 통증이 완화되었습니다. 죽도 드시고 간식도 드시고 산책도 하시고, 병원에서 오전과 저녁에 예배를 드릴 정도로 기력을 찾았습니다.
④ [어머니]가 호스피스병원에 입원하는 동안에 자녀들은 앞으로 어머니 뵈올 날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아들이 동생들에게 부탁하여 3일간씩 돌아가며 어머니 옆에서 간병을 담당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손자들, 증손들이 면회 와서 할머니를 위로하였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원로권사님에게 면회와서 예배드리고 위로해주었습니다.
췌장암 진단 107일, 호스피스병원입원 45일이 되는, 2023년8월8일(화요일)에 [어머니] 병이 갑자기 악화되어 임종실로 옮겨졌다고 간병 중인 [둘째 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이에 2023년8월9일(수) 오전11시에 **호스피스병원 임종실로 달려가 보니 이미 심장에서 먼 곳부터 차가움이 감지되고 의식이 없어 [아들]목사의 인도로 [둘째 딸과 셋째 딸]이 함께 마지막 임종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후 장례준비를 위하여 형제들이 역할을 분담하고, [어머니] 곁에는 [둘째 딸]이 지키는 중에 [어머니]는 2023년8월9일 오후1시45분에 하나님 부름을 받고 천국(낙원)으로 옯겨가셨습니다.
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온 가족들이 한 맘이 되어 장례식을 잘 마쳤습니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문객들이 함께 해 주었습니다. 장례 후 조의금결산에는 [어머니]의 [아들]과 [큰딸]은 빠지고, [어머니]의 [둘째 딸과 막내 딸]이 조의금 배분을 결정하였습니다. 상주인 [아들]은 [동생]들이 결정한대로, 먼저 장례예식비용을 제출하고 장례식예배를 주관한 교회와 고인의 본교회에 먼저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남은 조의금은 [어머니]의 [자녀] 4명에게 차별없이 똑같이 나누어 전달하였습니다. 장례식에 수고한 9명 [손자, 손녀]들에게도 50만원씩, [증손] 11명에게 5만원씩을 용돈으로 챙겨주었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어머니](할머니) 영생을 기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각자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15. 우리 가족의 구원의 열매와 간증들.
① [남편]은 50세가 되어 늦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작은 아들]이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난 후에야 한 풀이 껶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큰아들]이 총신대학교에 다니며 교회를 개척할 때, [남편]은 [큰아들]을 도와 예배당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남편]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바로 끊어 버렸습니다. 평생 하나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1991년도에 장로 장립을 받았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시다가 서울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는 중에 2016년 5월 7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에 가셨습니다.
② [큰딸]은 성실하고 선한 성품을 가진 지혜로운 딸입니다. 항상 [가정]과 [직장]과 [교회]밖에 몰랐습니다. 교회에서 [주일학교교사]로, [찬양대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큰딸]은 교회부흥회에서 방언체험과 은혜를 경험하고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큰딸]은 처녀 때 직장을 다니며 계를 들어 곗돈 50만 원을 타서 은혜를 끼쳐준 부흥강사 목사님에게 아낌없이 사례할 정도로 순수한 신앙생할을 하였습니다. [큰딸]은 [사위]를 만나 지방 시댁에 내려가 살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 [사위]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후로 목사의 사모로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습니다.
③ [큰아들]은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목회자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좋아하고 장래의 꿈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때에 대우중공업(주)에 다니다가 산재를 당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신학대학교에 입학하고 목사가 되어 목회자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항상 어렵고 소외된 자들을 대변하고 돌보는 사회복지사입니다.
[자부]는 목사 사모이고 권사입니다. 동원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보육교사로서 보육시설 원장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호된 시집살이를 하였지만, [며느리]에게는 언제나 인자하게 대하고 항상 감싸주었습니다.
④ [작은아들]은 제일 멋지고 잘생긴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찍 천국에 데려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22살 되던 해 부산에 친구들과 봉사활동 갔다가 친구들과 식사하던 중, 옆 테이블에 깡패가 소주병으로 친구를 습격하여 친구가 쓰러졌습니다.
[아들]은 친구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등에 둘러업고 비가 오는 저녁에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에덴공원 근처 8차선 대로에서 택시를 붙잡으려고 도로 안쪽으로 들어 갔다가 과속한 자동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천국으로 옮겨갔습니다.
[예수님]은 조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작은 아들]은 예수님을 믿고,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내 아들이 천국에 들어간 것을 믿습니다.「사랑하는 내 아들 대호야! 이다음 천국에서 만나자!」지금 어머니는 천국 낙원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만났다고 믿습니다.
⑤ [둘째딸]은 정치에 입문하여 지역사회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명지대학교법정대학과 서울장신대학원을 졸업한 석사입니다. 중등교사, 사회복지사, 보육교사로서 보육시설원장과 보육시설연합회장을 거쳐, 정치에 입문하였고, 모 시에서 3선 시의원과 시의회 의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둘째 [사위]도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부목사와 기도원 원목사역을 하고, 사회복지사로서 복지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막내딸]은 서울에서 태어나 경원대학원을 졸업한 석사입니다. 보육교사, 유치원정교사, 사회복지사로서 국공립 어린이집 원장으로 재직하며 어머니가 천국에 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모셔온 효녀입니다.
추모의 글을 마치며
우리 어머니 [박갑순 권사님]의 한 평생의 삶을 추모합니다. [권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자손]들이 다 예수님 구주로 믿고 구원받게 인도하셨습니다. 항상 [권사님]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시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 소재철 장로님과 우리 어머니 박갑순 권사님을 우리 소씨 가문에 [제1대 믿음의 조상]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 자녀들은 다짐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음신앙을 계승하겠습니다. 어머니가 빌어주셨던 자자손손 계대의 복을 받도록 신앙생활을 잘 하겠습니다.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겠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성수와 예배를 잘 드리겠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인간을 봉사하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영혼을 구령하고 살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부디 천국(낙원)에서 예수님 품 안기어 눈물 씻김을 받으시고 영생복락을 누리소서! 아멘.
박갑순 권사님의 병상 겔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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